본문 바로가기
명작 다시 보기

지구가 끝장나는 날(The World's End) 리뷰|술집 열두 곳의 이름이 줄거리였다

by NONEDONE M 2026. 9. 21.
반응형

비에 젖은 영국 소도시의 자갈길과 술집 앞 야외 테이블, 반쯤 비운 맥주잔 다섯 개와 펼쳐진 지도, 멀리 눈에서 푸른 빛을 내는 사람들 — 옛 친구들의 술집 순례가 낯선 밤으로 바뀌는 순간을 표현한 이미지입니다.
비에 젖은 영국 소도시의 자갈길과 술집 앞 야외 테이블, 반쯤 비운 맥주잔 다섯 개와 펼쳐진 지도, 멀리 눈에서 푸른 빛을 내는 사람들 — 옛 친구들의 술집 순례가 낯선 밤으로 바뀌는 순간을 표현한 이미지입니다.

한 번도 끝까지 마시지 못한 술집 순례가 있습니다. 1990년, 열여덟 살의 게리 킹과 친구 넷은 고향 마을 뉴턴 헤이븐의 술집 열두 곳을 하룻밤에 도는 ‘골든 마일’에 도전했다가 중간에 무너졌습니다. 20년 넘게 흘러 모두 어른이 됐지만, 게리만은 그날 밤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는 흩어진 친구들을 한 명씩 찾아가 다시 그 길을 걷자고 설득합니다.

《지구가 끝장나는 날》(The World's End, 2013)은 여기서 방향을 틉니다. 술집을 하나씩 지날수록 고향 마을은 어딘가 이상하고, 영화는 중년의 우정극에서 SF로 넘어갑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전환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답을 적어 두었습니다. 술집 이름입니다.

이 글은 결말을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술집 열두 곳의 이름, 3부작 안에서 이 영화가 선 자리, 그리고 화면 뒤에 있던 선택들을 차례로 짚어 봅니다.

영화 기본 정보

  • 원제: The World's End (2013, 영국)
  • 감독: 에드거 라이트 / 각본: 에드거 라이트, 사이먼 페그
  • 출연: 사이먼 페그(게리), 닉 프로스트(앤디), 패디 콘시다인(스티븐), 마틴 프리먼(올리버), 에디 마산(피터), 로저먼드 파이크(샘)
  • 영국 개봉: 2013년 7월
  • 장르: SF 코미디
  • 코네토 3부작의 세 번째 작품

술집 열두 곳, 이름이 먼저 말하고 있었다

영화가 시작하면 게리가 1990년의 그날 밤을 회상하며 골든 마일의 술집 열두 곳을 차례로 읊습니다. 처음 볼 때는 흘려듣게 되는 목록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로 보면 이 목록이 영화 전체의 차례표였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에드거 라이트 감독은 술집 이름이 그곳에서 벌어질 일을 미리 알려 주도록 지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1. 더 퍼스트 포스트(The First Post)
  2. 더 올드 패밀리어(The Old Familiar)
  3. 더 페이머스 콕(The Famous Cock)
  4. 더 크로스 핸즈(The Cross Hands)
  5. 더 굿 컴패니언스(The Good Companions)
  6. 더 트러스티 서번트(The Trusty Servant)
  7. 더 투 헤디드 도그(The Two Headed Dog)
  8. 더 머메이드(The Mermaid)
  9. 더 비하이브(The Beehive)
  10. 더 킹스 헤드(The King's Head)
  11. 더 홀 인 더 월(The Hole in the Wall)
  12. 더 월즈 엔드(The World's End)

몇 개는 결말을 몰라도 짐작이 갑니다. ‘벌집’을 뜻하는 비하이브는 하나의 의지로 움직이는 무리를, ‘인어’를 뜻하는 머메이드는 뱃사람을 홀리는 유혹을 떠올리게 합니다. 마지막 술집의 이름이 영화 제목과 같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나머지 이름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직접 확인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이 영화를 두 번 보게 만드는 가장 큰 재미가 거기 있습니다.

눈여겨볼 곳은 두 번째 술집입니다. 이름부터 ‘오래된 익숙함’인 이곳에서, 20년 만에 돌아온 친구들은 술집이 첫 번째 가게와 똑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투덜댑니다. 개성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비슷해진 고향. 이 영화가 결국 겨냥하는 대상이 이미 이 장면에 들어 있습니다.

코네토 3부작의 마지막 한 조각

에드거 라이트, 사이먼 페그, 닉 프로스트 세 사람은 《새벽의 황당한 저주》(2004)로 좀비 영화를, 《뜨거운 녀석들》(2007)로 형사 액션을 비틀었습니다. 《지구가 끝장나는 날》은 그 마지막 편이고, 이번에 빌려 온 장르는 외계 침공 SF입니다.

‘코네토 3부작’이라는 이름은 세 영화에 같은 브랜드의 아이스크림이 잠깐씩 등장한 데서 붙었습니다. 포장지 색도 영화마다 다릅니다. 피가 튀는 좀비 영화에는 빨간 딸기 맛, 경찰 영화에는 파란 오리지널, 그리고 SF인 이 영화에는 초록색 민트 초코칩이 나옵니다. 이번 편에서는 아주 짧게 스쳐 지나가니 찾아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세 편은 이야기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대신 같은 질문이 반복됩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내려놓는 일인가. 첫 편의 숀이 게으른 일상에서 벗어나야 했고 두 번째 편의 니콜라스가 지나친 규칙에서 풀려나야 했다면, 게리는 과거에서 걸어 나와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번에는 역할이 뒤집혔다

앞의 두 편에서 닉 프로스트는 철없는 쪽, 사이먼 페그는 그를 챙기는 쪽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그 관계를 정확히 뒤집습니다. 페그의 게리는 마흔 무렵이 되어서도 열여덟 살처럼 사는 인물이고, 프로스트의 앤디는 술을 끊고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사람입니다.

이 뒤집기가 3부작 전체에 무게를 더합니다. 관객은 앞의 두 편으로 두 배우의 호흡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앤디가 게리를 바라보는 차가운 눈빛은 단순한 설정이 아니라 오랜 친구를 향한 피로처럼 읽힙니다. 게리가 왜 그날 밤에 이토록 매달리는지, 앤디가 왜 술을 끊었는지는 영화가 천천히 꺼내 놓습니다. 그 과정이 이 영화에서 가장 덜 웃긴 부분이면서 가장 오래 남는 부분입니다.

영화의 첫 장면도 그 복선입니다. 게리는 둘러앉은 사람들 앞에서 1990년의 무용담을 신나게 늘어놓습니다. 그 자리가 어떤 모임인지 알아차리는 순간, 같은 이야기의 온도가 달라집니다.

제작 노트|세계 최초의 전원도시에서 찍은 가짜 고향

영화 속 뉴턴 헤이븐은 실제로 있는 마을이 아닙니다. 촬영은 주로 잉글랜드 하트퍼드셔의 레치워스 가든 시티와 웰윈 가든 시티에서 이뤄졌습니다. 레치워스는 20세기 초에 계획적으로 설계된 세계 최초의 ‘전원도시’로 알려진 곳입니다.

이 선택은 영화의 주제와 맞물립니다. 설계도에 따라 반듯하게 만들어진 도시, 어디를 봐도 정돈된 거리. 사람들이 조용히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마을을 그리기에 이보다 어울리는 배경은 드뭅니다. 친구들이 술집마다 ‘다 똑같다’고 느끼는 감각이 화면 속 풍경에서도 이어집니다.

캐스팅에도 눈에 띄는 점이 있습니다. 친구들의 옛 선생님으로 피어스 브로스넌이 등장하고, 마을 곳곳에서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목소리는 빌 나이가 맡았습니다. 앞선 두 편에 얼굴을 비쳤던 배우들이 곳곳에 다시 나오는 것도 이 시리즈의 전통입니다.

1990년에 멈춘 플레이리스트

사운드트랙은 대부분 1990년 전후의 영국 음악입니다. 프라이멀 스크림, 블러, 펄프, 수프 드래곤스 같은 당시 밴드들의 곡이 술집을 옮길 때마다 흘러나옵니다.

이 음악은 향수를 자극하는 장치이기 전에 게리라는 인물의 설명입니다. 그의 낡은 차도, 옷차림도, 차 안에서 트는 카세트테이프도 모두 그해 여름에 멈춰 있습니다. 친구들이 20년 동안 다른 음악을 들으며 나이를 먹는 사이, 게리의 플레이리스트는 한 곡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음악이 신날수록 게리가 딱해 보이는 이유입니다.

흥행과 평가

제작비는 약 2,000만 달러, 전 세계 극장 수익은 약 4,600만 달러로 집계됩니다. 3부작 가운데 흥행 1위는 약 8,000만 달러를 기록한 《뜨거운 녀석들》이고, 《지구가 끝장나는 날》은 첫 편보다는 많고 두 번째 편보다는 적은 가운데 자리에 있습니다.

평단의 반응은 대체로 호의적이었습니다. 다만 후반부의 SF 전개가 앞의 두 편보다 크게 부풀려졌다는 지적과, 결말이 지나치게 과감하다는 의견도 함께 나왔습니다. 관객 사이에서도 3부작 중 가장 좋아하는 편으로 꼽히는 경우와 가장 덜 좋아하는 편으로 꼽히는 경우가 모두 흔한 영화입니다.

✂️ NONEDONE’s Cut

3부작 가운데 가장 덜 웃긴 영화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의 두 편에서 주인공의 결점은 웃음의 재료였습니다. 게으름도, 지나친 성실함도 결국 풀릴 문제였습니다. 게리의 결점은 다릅니다. 그는 과거에 붙잡혀 있고, 그 이유는 농담으로 덮이지 않습니다. 영화는 끝까지 웃기려 애쓰지만, 게리가 크게 웃을수록 관객은 덜 웃게 됩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SF 설정은 포장에 가깝다고 봅니다. 모든 것이 반듯하게 정돈된 마을, 그리고 그 안에서 가장 엉망인 남자. 에드거 라이트는 외계 침공이라는 장르를 빌려, 어른이 된다는 것이 반드시 매끄러워지는 일이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술집 열두 곳의 이름을 알고 다시 보면 이 영화는 다른 영화가 됩니다. 한 번 보고 판단하기엔 아까운 작품입니다.

NONEDONE’s score: 8.4 / 10

3부작 중 가장 거칠지만 가장 진지한 편입니다. 웃음의 양이 아니라 남는 질문의 무게로 매긴 점수입니다.

이런 분께 권합니다

  • 《새벽의 황당한 저주》와 《뜨거운 녀석들》을 재미있게 보신 분
  • 다시 볼 때 새로 보이는 복선을 좋아하시는 분
  • 1990년 전후 영국 음악을 좋아하시는 분
  • 오랜 친구와의 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영화를 찾는 분

3부작을 처음 접하신다면 이 영화보다 《새벽의 황당한 저주》부터 순서대로 보시길 권합니다. 이야기는 이어지지 않지만, 두 배우의 관계가 뒤집히는 재미는 앞의 두 편을 알아야 온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술자리가 이야기의 중심이고 후반부에는 격투 장면이 길게 이어진다는 점도 참고하세요.

작품 정보와 출처

  • 《지구가 끝장나는 날》(The World's End), 2013, 영국 — 감독 에드거 라이트 / 각본 에드거 라이트, 사이먼 페그
  • 코네토 3부작: 《새벽의 황당한 저주》(2004), 《뜨거운 녀석들》(2007), 《지구가 끝장나는 날》(2013)
  • 제작비와 흥행 수치는 Box Office Mojo, The Numbers 등 공개 집계 자료를 정리한 근사치이며 집계처와 시점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 촬영지와 술집 이름의 의도에 관한 내용은 제작진 인터뷰와 공개 보도를 바탕으로 정리했습니다. 개별 술집 이름에 대한 해석 가운데 일부는 관객의 해석이며, 제작진이 하나하나 확인한 것은 아닙니다.
  • 대표 이미지는 직접 생성한 것으로 영화의 실제 장면이 아니며, 등장인물이나 배우를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 이 글의 해석과 평가는 작성자 개인의 감상입니다. 결말에 관한 스포일러는 넣지 않았습니다.
반응형